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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layers tribune] 세르단 샤키리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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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나 작성일18-07-16 03:12 조회1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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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herdan Shaqiri
SWITZERLAND
JUN 22 2018



우리집에는 히터가 없었다. 단지 커다란 벽난로가 있었을 뿐이다.


정말 낡은 벽난로였고, 바젤에 위치한 농가에 오래된 집에 걸맞는 것이었다.


난 히터를 사용해서 따뜻하게 지낸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미친놈처럼 런닝을 하면서 스스로 따뜻하게 했었을 뿐이다.


내 형은 항상 춥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형의 방이 윗층이었고, 벽난로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형은 겨울에 담요 다섯개를 포개어 덮어야지만 잘 수 있었다.



내 가족은 전쟁 발발 이전에 코소보(Kosovo)를 떠났다. 내가 4살이 되던 해였다.


그리곤 나와 내 위로 2명의 형을 책임지며 부모님께선 스위스에서 삶을 이어가려 노력하셨다.


물론 쉽지 않았다. 아버지께선 Swiss German(스위스에서 쓰는 독일어)을 구사하지 못하셨고, 따라서 레스토랑에서 그릇을 닦는 등의 잡일부터 시작해야만 하셨다.


아버지께선 이후 도로를 공사하는 인부로 일하셨고, 어머니께선 도심에 있는 건물 내부 청소부로 일하셨다.

(난 어머니를 도와 옆에서 청소기를 돌렸고, 나의 두 형들은 창문을 닦았다.)


스위스는 누구에게나 물가가 매우 비싼 곳이다. 


하지만 부모님께선 남들보다 약간의 어려움을 더 겪으셨다.


많은 돈을 코소보(Kosovo)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해 부치셔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몇해동안 우린 코소보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보러 갈 수 있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사실, 어머니께선 다음과 같이 항상 말씀하셨다.

"비행기에서 너희는 항상 말썽을 부리는 구나. 매번 좌석을 기어오르고, 사람들을 함부로 만지고, 절대 조용한 법이 없어!"


그러나 이후에 코소보에서 전쟁이 발발했고, 우린 그곳에 더이상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코소보에 남아있던 가족들의 상황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내 삼촌의 집은 불에 타 없어졌으며, 그밖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아버지께선 그가 보낼 수 있는 최선으로 돈을 부치셨고, 이로인해 우린 스위스에서 생활하면서 여분의 지출을 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자라면서 기억을 해보면, 생일날을 빼고는 대부분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 같다.



좀 재밌는 이야기를 해볼까.


난 호나우두를 좋아한다. 그는 내 우상이다.


아 물론 오리지날 호나우두(Ronaldo)를 말한다.


그가 플레이하던 모습은 어린 나에게 그당시 마법과 같았다.


98년 월드컵 결승 내내 부상에 시달렸고, 프랑스에게 결국엔 패배했었을 때, 펑펑 울었던게 기억난다.



내 7번째 생일은 월드컵이 끝나고 3달 후에 있었는데, 어머니에게 그 3달 내내 계속 말했었다.


"제가 생일날 원하는 건 오로지 호나우두의 브라질 노란 져지에요. 제발요. 그 져지 갖고 싶어요."


내 생일이 다가왔고, 어머니께선 나에게 박스 한상자를 건내 주셨다.


열어봤더니 호나우두의 노오란 브라질 져지였다.


비록 그 져지는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는 모조품 중 하나였고, 심지어 브라질 엠블럼도 없는 것이었다.


단지 그냥 노란 셔츠였고 초록색으로 9번이 적혀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진품을 구매하실 금전적인 여유가 없으셨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당시 나에게 진품인지 가품인지는 중요한게 아니었다.


그날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난 열흘간 그 셔츠를 매일마다 입고 다녔고, 어디서 노란 바지까지 구해서 입고 다녔다.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면, 난 학급에서 유일한 이민자였다.


그리고 스위스 아이들이 왜 내가 축구에 사로잡혀 사는지에 대해 이해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스위스에선 축구는 단지 여러 스포츠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유럽의 다른 곳에서처럼 축구가 전부인 곳은 아니다.


내가 기억하기로 4년 후에 호나우두가 2002년 다시 등장했고, 당시 삼각형 모양으로 앞머리를 남겨놓는 헤어 스타일을 했었다.


난 곧바로 미용사에게 가서 "호나우두처럼 해주세요!"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금발에 곱슬머리였고, 그 상태로 호나우두 헤어스타일을 하는 건 미친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 등교했더니 모든 아이들이 나를 보면서 "뭔일이 있었던 거야 ㅋㅋㅋ" , "야 머리에다 뭔 짓을 한거야 ㅋㅋㅋㅋ"라고 놀렸다.


이에 대해 난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고, 단지 '남의사, 나는 나일뿐이야.' 라는 생각을 했다.


내 학교는 도심의 좋은 지역에 위치해 있었지만, 우리 집은 낙후된 지역에서 5분이나 더 가야하는 곳에 위치해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축구하기엔 최고로 좋은 공간이 있었다.


어머니께선 내게 축구하러 가지 말라고 말리셨지만, 방과후 그곳에 매일마다 갔었다.


한마디로 축구에 미쳐있었다.


축구할 때마다 느꼈던건 매번 팀들이 유엔(United Nation)같았다는 점이다.


팀원 중엔 터키인, 아프리카인, 세르비아인, 알바니아인 등등


모두 함께 어울렸다.


그 공간이 특이한 건 단지 축구만 행해진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축구를 하고 있는데, 동시에 피치의 다른 쪽에서 몇몇 애들은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몇몇은 프리스타일 랩배틀을 


하고 있었으며, 피치의 한쪽에서는 유색의 여자애들이 유유히 걸어다녔다.


그러나 우리가 했던 축구만큼은 진지했다. 매번 나는 입을 꽉 다물고 축구에 임했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곳에서 했던 축구가 나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왜냐면 난 상대적으로 그 당시에도 키가 작은 아이였고, 그때부터 키큰 애들에게 둘러 쌓인 채 축구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14살이 되던 때, FC 바젤 유스팀에 들어갔다. 체코 프라하에서 나이키 컵 대회가 열렸었고, 출전 기회가 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날부터 몇일간 학교를 빠져야 한다는 점이다.


선생님께 이점에 대해 여쭤봤을 때, 돌아온 대답은 당연하게도 "NO" 였다.


스위스에선 선생님과 공교육이 매우 엄하다.


때문에 난 생각했다. "젠장, 좋아 그렇다면 아픈척하고 빠져야겠다."


곧장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학교에 내가 감기가 걸려서 몇일간 결석해야 될 것 같다고 전해달라고 하곤 프라하로 경기를 뛰러 갔다.


당시에 난 매우매우 좋은 활약을 했다. 그리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시선을 경험했다.


"쟤가 바젤에서 온 걔야."


그건 너무 짜릿한 기분이었다.



토너먼트가 끝나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학교에 등교했다. 여전히 아픈척을 하면서.


선생님께선 날 보자마자 말씀하셨다.


"세르단 이리 와바라. 어서."


그는 손을 흔들어 나를 불렀고, 그가 보던 신문을 책상에 내려 놓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너 아픈거 맞니?"


그리곤 그 신문 맨 앞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신문에는 내가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 토너먼트 트로피를 들고 있었다.'


난 그대로 얼어붙어서 멀뚱멀뚱 선생님을 쳐다봤다.


"아 좆됐다."



그 토너먼트 이후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금전문제는 여전히 우리 가족의 숙제였다.


왜냐하면 내 두 형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바젤에서 플레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토너먼트에 참가하려고 돈을 지불해야 할 때마다 남들보다 3배를 내야하는 셈이었다.


16살이 되던 해, 스페인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고, 그 당시 700 Swiss Francs(원화로 약 80만원)이었다.


아버지께선 우리 삼형제를 불러 모으셨고, 말씀하셨다.


"얘들아 너희 모두가 참가하기는 불가능 하단다. 우린 그만한 여유가 없어."



그래서 우리 삼형제는 모두 트레이닝 캠프 참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소일거리를 찾았다.


난 가까운 이웃들에게 가서 3주간 잔디를 깎아주며 돈을 벌었다.


내 형 중에 한명은 유리 만드는 공장에 가서 일을 했었다.


어쨌든, 우린 돈을 마련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3형제 모두 스페인으로 갈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내가 기억하는건, 그 당시 내가 느낀 가장 큰 두려움은 우리 삼형제가 캠프에 참가할 수 없을 거라는 게 아니라, 내 팀 동료들이 우리가 캠프비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모두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치부가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는 얼마나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인지를.


트레이닝 후에 모든 아이들은 매점에 가서 간식을 사먹었지만, 우리 삼형제는 집으로 돌아갈 경비를 남겨두고 그 이상 절대로 지출하지 않았다. 대신에 난 생각했다. 나로 하여금 다른 방식으로 배고프게 만들겠다고.


'나는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에 항상 굶주려 있었다.'


[the players tribune] 세르단 샤키리 스토리


그로부터 1년후에 17살이 되던 해, 난 바젤 1군팀에 콜업 되었다.


어느날은 경기가 끝나기 20분 전에 내가 투입되었고, 그 경기에서 내가 생각해도 꽤 잘했다고 여겼었다.


다음날 훈련장에 평소처럼 도착했는데, 유스팀 코치님이 나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너 뭐하는 거야?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대체!"


난 너무 당황해서 말했다. 


"무슨 말씀하시는 거에요?"


코치님이 말하길 "감독님과 얘기했는데, 감독님이 니가 한건 드리블 밖에 없었대. 널 2군으로 다시 내리겠다고 하신다."


난 너무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 당시 바젤에서 내 선수생활이 끝나는 줄만 알았다.



2주 후에 바젤은 감독을 해임했다. 새로운 감독님께서 오셨다. 그는 나를 1군 팀으로 다시 불렀는데, 지금 생각하면 꽤 재밌는 상황이 연출 됐다. 


감독님께서 나를 왼쪽 윙백으로 기용한 것이다.


글쎼, 알다시피 난 공격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수비수들은 항상 나에게 소리치곤 한다.


"우리 진영으로 빨리 복귀해. 얼른 돌아오라고!1"


ㅋㅋㅋ 그러니까 감독의 결정에 내가 뭐라 할말이 없는게 당연했다.


근데 또 막상 풀백 기용이 잘맞았고, 곧잘했다.


이건 기록이 말해주는데,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차출된 점이 그렇다.


그 당시 정말 생각지도 못했었다.


월드컵에 차출된다는 건 정말 개쩌는 일이다.


내 이름이 국대 스쿼드에 올라왔을때, '아 지금도 울컥하네...' 아마 지금까지 감동적인 순간이었지 싶다.


난 곧장 집으로 달려가서 부모님께 얘기했다.


당연히 모두가 얼싸안고 기뻐했다.



생각해보면 엄청 빨리 벌어진 일이다.


내가 16살이던 어느날은 스페인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하려고 이웃 주민들 잔디를 깎으면서 돈을 벌었는데, 

18살에는 월드컵에 뛰기 위해 남아공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타고 있으니 말이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스위스가 스페인을 상대로 했던 때를 기억한다.


당시에 내 앞에서 이니에스타를 보면서 난 생각했다.


"와 내가 TV에서 보던 사람이네. 근데 바로 내 앞에 있네."


근데 여기서 내가 기억하려는 건 우리가 남아공에 처음 도착했었을 때다.


우린 예정된 호텔에 들어갔고, 그 호텔에는 커다란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서있었다.


선수들이 묵는 모든 객실 문 밖에서 말이다.



우리를 지키려고 있는 개인군사들이라. 난 이게 참 so cool하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러니까,,, 그 전에는 밤에 치안 등을 이유로 공원에서 런닝조차 제대로 못했었는데, 이젠 나를 지켜주는 개인 군사가 있으니 말이다.


내 부모님에겐 월드컵에서 내가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이 너무 자랑스러우셨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께선 아무것도 없이 스위스로 오셨고, 정말 열심히 일하셔서 자식들을 좋은 삶을 살도록 길러주셨으니까.



난 미디어가 종종 내가 스위스에 가지는 감정들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두개의 집이 있을 뿐이다. 간단하다.


스위스는 나의 가족에게 모든 것을 주었고, 난 스위스 국대를 위해 모든 것을 주려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코소보(Kosovo)에 갈 때마다, 그 즉시 이곳 또한 내 집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논리정연한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내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바를 솔직히 얘기하는 것 뿐이다.


[the players tribune] 세르단 샤키리 스토리


12년에 스위스가 알바니아를 상대로 경기했을 때, 난 스위스 국기와 알바니아 국기와 코소보 국기를 내 축구화에 새겼었다.


그런데 몇군데의 스위스 언론이 이것에 대해 부정적인 논조로 얘기했었던 걸 기억한다.


그로 인해 난 많은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몇몇 사람들이 그런식으로 느끼는 건 나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든다.


이건 단지 내 정체성에 관한 문제일뿐이다.


스위스가 가진 가장 훌륭한 점은 전쟁과 가난으로부터 도피해서 보다 나은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을 환영해 주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스위스는 커다른 호수와 산들이 둘러싸고 있지만, 그 외에 넓은 공원 또한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공원에선 터키인, 세르비아인, 알바니아인, 아프리카인들이 한데 어울려 축구를 할 수 있고, 독일 래퍼가 프리스타일 래핑을 하기도 하며 유색의 소녀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걸어다니는 곳이기도 하다.


스위스는 그렇게 모두를 위한 곳이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18년 러시아 월드컵에 발을 디딜 때, 스위스와 코소보 국기 모두를 내 축구화에 새길 예정이다.


이는 정치적인 부분이나 그와 관련된 어떤 것을 얘기하려는 게 결코 아니라, 단지 국기가 그 자체로 내 인생 스토리를 단번에 얘기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마라. 스위스 국기가 내 왼발에 새겨져있을 거니까.



[the players tribune] 세르단 샤키리 스토리
Xherdan Shaqiri
SWITZERLAND


http://www.theplayerstribune.com/en-us/articles/xherdan-shaqiri-switzerland-now-i-got-my-own-army-g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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