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독에의 향수 ***
- 글 / 안병욱(安秉煜) -
인간은 세 개의 눈을 갖는다. 첫째는 밖으로 향하는 눈이요, 둘째는 위로 향하는 눈이요, 셋째는 안으로 향하는 눈이다. 밖으로 향하는 눈은 자연과 객관적 대상의 세계로 향한다. 위로 향하는 눈은 신과 종교적 신앙의 세계로 향한다. 안으로 향하는 눈은 자아와 내면적 세계로 향한다. 청년의 사색과 관심의 특색은 내향성과 내면성이 있다. 그는 눈을 밖에서 안으로 돌리고 남에게서 자기에게로 돌린다. 청년은 주로 자아와 내면적 세계로 향한다. 그것은 자기 발견, 자기 탐구, 자기 성찰, 자기 응시의 눈이다. 내가 나의 내적 세계를 들여다보려는 눈이다.
사색에는 조용한 환경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색하기 위해서 주위의 접촉에서 격리되어 조용한 장소를 구한다. 더구나 자기 성찰에는 그러한 환경이 요구된다. 고독은 사색하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나를 응시하고 조용히 인생을 명상하는 시간을 가진다. 청년은 고독에의 향수를 느끼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이 말한 바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서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것과 같다.
고독의 시간은 어떤 의미에서 구원의 시간이다. 젊은 혼은 고독 속에서 마음껏 꿈을 꿀 수 있고 감상에 젖을 수 있고 상상의 날개를 타고 낭만의 세계를 달릴 수 있다. 내가 나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젊은이는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다.'고 시인 괴테는 노래했다. 꿈을 꾼다는 것은 젊은 생명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애지자의 정신만이 날개를 가진다'고 플라톤은 말하지 않았던가.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를 향해서, 미를 찾아서, 이상의 세계를 동경하여 한없이 위로 높이 날개를 펴며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꿈은 어디까지나 꿈이요, 결코 현실은 아니다. 이데아에 대한 꿈과 이상에 대한 도취는 현실의 대지로 돌아와야 한다. 꿈은 깨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여러 사상가들이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한 애찬하였다. 고독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지한 사색을 위한 정신의 터전이었다. 니체는 '고독은 나의 고향이다'라고하였으며, '진리는 호의에서 착상된다'라고 하였다. 니체는 고독한 산보 속에서 사상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칸트도 또한 그러했다. 그의 줄기찬 철학적 사색은 케니하스베르크의 고적한 숲 속을 조용히 산보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철인 스피노자는 홀로 렌즈를 닦으면서 사색을 연마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사람의 인품은 타인과의 접촉에서 연마되고 원만해진다. 모가 진 돌멩이들이 서로 부딪쳐서 둥그런 자갈이 되듯이 규각을 가진 인간은 상호 접촉하는 가운데서 원만한 성격이 형성된다.
그러나 사색에는 고독의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물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것은 오직 고독 속에서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고독 속에서 벗어나 현실의 생활로 돌아와야 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남과 교통하는 사회적 실존이다. 우리는 사색을 위해서 가끔 고독의 세계를 갖는 것은 좋으나 고독 속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나와 너와의 생명적 공감의 따뜻한 인간적 대화 속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고독은 정신의 산책처지 영원한 안식처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한 바와 같이 '완전한 고독 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것은 야수나 신뿐이다.'
'네 영혼은 피로하거든 산으로 가라'라고 독일의 시인은 노래했다. 우리는 사색과 자기 성찰을 위해서 고독한 환경을 가끔 택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고독은 우리의 안식처는 아니다. 독일의 시인 뤼케르트는 '고독 속에서 살아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말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정말 고독 속에 혼자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거인이요, 정신력이 비상하게 강한 인간이다. 문호 입센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한 인간이다.'
산에 가면 거리가 그립고 거리에 있으면 산이 그리워진다. 자연 속에 있으면 문명이 그립고 문명 속에 있으면 자연이 그리워지는 것이 사람이다. 고독도 그와 비슷하다. 혼자 있으면 사람이 그리워지고 사람 속에 있으면 고독이 그리워진다. 청년들은 고독을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의 고독은 흔히 감상주의로 미화된 고독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고독에 대한 향수를 좋아하는 것이다.
니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정신적 거인만이 진정한 고독에 견딜 수 있었다. 청년의 고독은 애상과 낭만이 짝짓는 센티멘털리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 고독할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군중 속에 섞일 때 더 한층 고독을 느낀다. 서로 따뜻한 대화를 잃어버릴 때 인간은 고독한 것이다. 낯선 군중들 속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느낄 때 우리는 고독의 비애를 느낀다. 현대인에게는 이러한 고독이 더욱 심해진다. 홀로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많은 군중들 속에서 대화할 벗이 없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고독 속의 고독보다도 군중 속의 고독이 더욱 외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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