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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수장이 정권과 내통한 건 심각한 자해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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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명훈 작성일18-06-20 15:54 조회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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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30돌 맞은 민변·한겨레 ‘주역’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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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가 지난달 29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최근 저서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들고 참다운 법치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조일준 기자 [email protected]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 공동대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창립회원,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이사, 감사원장,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 한승헌(84·사진) 변호사의 대표 이력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삶의 궤적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엔 1960~80년대 군부독재 시절 정치적 양심수와 조작간첩사건 변론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겪어야 했던 고난의 세월이 켜켜이 새겨져 있다. 지난 5월 민변과 <한겨레>가 나란히 탄생 30돌을 맞았다. 한승헌 변호사 개인에게도 뜻깊은 시기가 아닐 수 없다. 마침 한 변호사는 최근 10여년 동안의 강연·대담·인터뷰 등을 추려 모은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삼인)를 출간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 변호사와 인터뷰를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억력 감퇴”를 걱정한다는 그이지만 인터뷰 내내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고, 답변이 명료했으며, 유머 감각도 잃지 않았다.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출간 
최근 10여년 강연·대담·인터뷰 모아 
60여년 ‘법조인생’ 법치주의 본질 ‘설파’

법조인 윤리는 ‘인권 옹호·정의 실현’ 
‘외풍’ 아닌 전 대법원장 ‘내풍’에 충격 
“법치는 권력자에 대한 상향적 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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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가 지난달 15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한겨레> 창간 30돌 기념식에서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으로서 축사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email protected]

-건강은 어떠신가?

“80대에 접어든 뒤의 나의 건강은 ‘대외비’다. “건강하시지요?”라는 인사성 물음에는 “나이만큼 건강합니다”라고 말한다. 사실에 부합되는 모범 답안이다. ‘무슨 운동을 하시냐’는 질문에는 ‘왕년에는 석방운동을 많이 했습니다만…’하는 우스개로 답하곤 한다.”

-올해는 민변 30주년, 한겨레 30주년이기도 하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다.

“민변과 한겨레 둘 다 87년 6월항쟁의 함성과 결실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중요하다. 당시 재야세력의 총본산이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활동과 한겨레신문의 창간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감회가 깊다. 그동안 갖가지 시련을 극복하고 오늘 이만큼의 민주세상을 이룩하는데 큰 몫을 했다는 의미에서 한겨레와 민변의 발자취는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한 변호사는 87년 6월 항쟁 당시 국본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항쟁을 이끌었다. 앞서 고등학교 시절, 한 변호사의 장래희망은 “신문 기자나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언론인”이었다고 한다.)

-약관 스물여섯이던 1960년 4·19 직후 검사 발령을 받았고, 몇 년 뒤엔 법무부 검찰국과 서울지검에서 탄탄대로를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꽃길’을 접고 1965년 변호사로 전업하셨다. 왜 굳이 힘든 길을 선택하셨나?

“검사보다는 평범한 변호사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는 자서전에 “성격상 사람의 죄책을 추궁하는 것보다는 억울한 사람을 옹호하는 변호 활동이 적성에 맞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5년만에 검사를 그만뒀다. 그런데 박정희 독재에 휘말렸다. 1965년은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 반대가 정점에 이르렀고 군사독재가 본격화한 시기다. 양심수가 급증했다. 첨엔 몇 사람 변론하다 끝날 줄 알았지. 그런데 탄압이 장기화되는 바람에 자신도 예상치 못하게 ‘시국사건 변호사’라는 길을 걷게 됐다. 내 신상의 불이익 때문에 외면했다간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못 견딜 것 같았다.”

-시국사건의 첫 변호를 맡은 사건이 1965년 소설가 남정현의 단편 ‘분지’ 필화사건이다. 중앙정보부가 반미·친북으로 몰아간 사건인데 부담스럽진 않았나?

“문학작품을 용공으로 몰아 기소한 이례적인 사건이어서 주목받았다. 작가 자신은 적지 않은 심신의 고통을 겪었지만, 나는 변호인이어서 별 두려움을 느끼진 않았다. 8.15 해방 이후 한국에 진주한 미군의 성적 만행을 문제 삼은 내용인데 “북괴 주장에 동조한 이적표현물”이라며 반공법 위반으로 재판까지 하면서 국내외에 충격을 주었다. 1심에서 선고유예 판결이 나자 일부에서는 무죄판결이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평가도 나왔다. 그래도 문인이나 지식인 사회에 미친 경고와 통제 효과가 상당했다.”

-지금까지 동백림 사건(1967), 통일혁명당 사건(1968), 울릉도 간첩단 사건(1974), 민청학련 사건(1974), 김대중 내란음모사건(1980),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1989),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건(2004) 등 역사적인 시국사건들의 변호인으로 참여했다. 어느 하나 가볍지 않지만, 그 중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모든 사건을 다 잊을 수 없지만 그중에서도 1974년 4월 대통령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잡아넣은 민청학련 사건, 그리고 그 배후 세력으로 날조된 2차 인혁당 사건을 잊을 수 없다. 검찰관 구형대로 사형·무기가 양산되는 판이어서 나는 ‘정찰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인혁당 사건은 1975년 대법원 선고가 나온 지 18시간 만에 8명의 무고한 인명이 사형집행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내가 변호한 여정남 씨도 있었다. 더욱이 나는 그의 형 집행 당시에 반공법 위반 필화사건으로 수감 중이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인혁당 사건은 32년만인 2007년에 재심 무죄 판결이 나왔지만, 법원의 ‘사법살인’만 재확인시켜주었을 뿐, 죽은 목숨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는 법이고 보면, 그런 참담한 비극이 어디 또 있겠는가.”(한 변호사의 필화사건도 지난해 재심에서 42년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막스 베버는 직업 정치인의 덕목으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강조했다. 직업 법조인에게 요구되는 윤리가 있다면?

“‘인권 옹호’와 ‘정의 실현’이다. 판·검사는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공직자 신분이다보니 국가주의 내지 사회통제 중심의 사고 성향이 있고, 정치권력이나 조직의 요구를 거역하는 게 쉽지 않다. 판·검사가 저지를 수 있는 오류를 과감히 지적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게 재야 법조인, 변호사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박근혜 정권과의 사법 거래, 사법행정권 남용,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등 정법 유착의 행태가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어떻게 보시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기존의 사법권 침해는 주로 집권세력 내지 행정부가 사법권에 간섭하는 ‘외풍’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사법부 내부에서 권력에 영합하거나 편승하는 ‘내풍’의 위험성이 훨씬 심각하다. 그런데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태는 사법부가 집권세력과 적극적으로 내통해 모의하고 거래하는 능동적 야합까지 나아간 것으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법관의 신상을 내사해. 블랙리스까지 만들고도 편 가르기와 차별은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럼 그런 리스트를 왜 만들었겠나. 특별조사단이 조사 결과를 낱낱이 국민에 공개하고, 책임자의 합당한 사죄와 법적 책임이 뒤따라야 사법부가 거듭날 수 있다. 국민이 사법부와 재판을 불신하게 되는 건 사법부의 자해 행위다.”


양승태 구속, 특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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